창우사건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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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우사건축회(소우샤-켄치쿠카이)는 일본의 근대건축운동 단체 중 하나이다. 관동 대지진 직후인 1923년 10월에 결성되어 1931년에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개설

창립 멤버는 최고령자인 야마구치 분조(1902-1978; 당시에는 오카무라 카조라 칭함)를 리더로, 센도 에이키, 오가와 코조, 우메다 유타카, 히로키 카메키치 등 5명으로, 18세부터 21세까지의 체신성 영선과 기술사, 제도공 동료였다. (이들은) 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 관료 건축가 밑에서 건축 설계 제도나 건설 현장 감리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학력은 모두 직업학교나 야학 등에서 실용적인 건축 교육을 받은 것으로, 서로 격려하며 건축, 회화, 어학 공부를 계속하던 같은 직장 동료들이었다.

이후 에비하라 이치로, 이마이즈미 젠이치, 도묘 에이지, 카와스기 이츠미, 다케무라 신타로, 와타리 오, 노구치 이와오, 히라마츠 요시히코, 히로세 하츠오, 사키야 코사부로, 후루카와 스에오, 야마구치 사카에가 합류한다. 이 중 에비하라, 히로세, 야마구치는 도쿄미술학교(현재의 도쿄예술대학) 출신이다.

창우사건축회 결성의 계기는 관동대지진 직후에 도쿄중앙우편국 옆에 세운 영선과의 응급 건물에 모였을 때, 바로 이런 때일수록 동료들이 서로 불러내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후에 야마구치 분조는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뿐만 아니라, 지진 직후부터는 「라토」, 「극장의 3과」, 「바라크장식사」 등 수많은 건축 및 예술 그룹이 결성되어 다양한 예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근대건축운동 그룹으로는 1920년 도쿄 제국대학 건축학과 학생들 6명으로 시작한 분리파건축회가 효시로 여겨진다. 분리파건축회는 낭만적인 건축 선언을 발표하고, 낭만적인 건축 제안의 전람회를 7회 개최한 후 1928년경 사라진다. 이 엘리트들의 운동에 창우사건축회도 자극받아 설립된 것도 분명하다. 실제로 리더인 야마구치 분조는 분리파건축회 멤버였던 영선과 상사 야마다 마모루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분리파건축회 전람회에 출품한 바 있다.

창우사건축회도 선언과 전시회로 시작한다. 1923년 11월 창우사 제1회 전시회 도록에는 우메다 유타카의 원안으로 여겨지는 창우사 선언이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다.

우리는 고대인의 순정한
창조의 마음을 뜨겁게 사랑하며, 모방이라 부르는
불순한 풍조에 물들지 않고
영원한 어머니에 대한 동경을 품어
퇴폐와 진부함에 빠진
현 건축계의 각성을 기한다
우리는 생의 교향악―전 우주에
우리의 생명, 아름다운 「매스」를
드러내기 위해 전심 노력한다

그후 1930년 제8회 전시회까지 강연회나 협동하여 공개설계경기에의 응모, 다른 예술 운동 그룹과의 협동활동 등을 펼쳐 갔다. 전람회 출품의 내용은 초기에는 분리파건축회의 뒤를 따르는 로맨틱한 경향의 것이었으나, 노동자를 위한 시설이나 건축 생산 방식의 제안 등, 점차 그들만의 독자적인 길을 찾는 경향으로 전환되어 갔다.

1930년 10월, 일본의 건축가들을 규합하는 「신흥건축가연맹」이 결성되어, 도쿄제국대학, 와세다대학, 도쿄미술학교의 교원, 체신성 직원 등을 포함한 약 100명이 참여했다. 새로운 운동 전개를 꾀하기 위해 창우사 멤버들도 전원 참여했으나, 신문의 적색 선전으로 인해 곧바로 와해되었다. 이 해 말에 야마구치 분조가 유럽으로 건너가 리더가 없어지고, 1931년에 발생한 관료 감봉 소동에 휘말려 체신성 소속 멤버 전원이 해고되는 사건이 일어나 창우사건축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미약한 이 흐름은 ‘청년건축가연맹’, ‘건축과학연구회’, ‘청년건축가클럽’ 등의 성쇠를 거쳐 전후 일본건축문화연맹, 관서건축문화연맹, 전일본건축민주협의회를 발족하고, 이후 ‘NAU신일본건축가집단’, 그리고 ‘신건축가기술자집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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