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헌장


브라질리아의 디자인 – 아테네 헌장의 영향. via Wikimedia Commons

아테네 헌장(프랑스어 외래어 표기: 샤르트 다테네, 그리스어 외래어 표기: 하르타 톤 아티논)은 스위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1933년에 발표한 도시 계획에 관한 문서이다. 이 작업은 르코르뷔지에의 1935년 저서 『빛나는 도시』(빌 라디외즈)와 1930년대 초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에 의해 수행된 도시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 헌장은 1933년 제4차 CIAM 회의 개최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당시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회의는 마르세유에서 아테네로 향하던 여객선 S.S. 파트리스 호 선상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지그프리트 기디온(1888-1968)이 의뢰하고 그의 친구 라슬로 모홀리-나기(1895-1946)가 제작한 영화 〈건축가 회의〉에 기록되어 있다.

이 헌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계획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배경

르코르뷔지에는 1920년대에 이상적인 도시인 ‘빌 콩탕포렌’에 대한 아이디어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초반 국제적 도시 계획가들과 접촉한 후 그는 ‘빌 라디외즈(빛나는 도시)’ 작업에 착수했다. 1930년에 그는 생디칼리슴 운동(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적극적 구성원이 되었으며, ‘빌 라디외즈’를 사회 개혁의 청사진으로 제안했다.

빌 콩탕포렌의 방사형 설계와 달리, 빌 라디외즈는 머리, 척추, 팔, 다리로 이루어진 인간 신체의 추상적 형태를 바탕으로 한 선형 도시였다. 이 설계는 그의 이전 작업에서 제안된 고층 주거 블록, 자유로운 순환, 풍부한 녹지라는 개념을 유지했다. 르코르뷔지에는 1930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3차 CIAM 회의에서 이 구상의 첫 도판을 선보였고, 1935년에는 이 도시 이름과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기능 도시

기능 도시의 개념은 브뤼셀 회의 이후 CIAM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1931년 취리히 회의에서 CIAM 회원인 르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지그프리트 기디온, 루돌프 슈타이거, 베르너 M. 모저는 코르넬리스 반 에스테렌과 함께 주어진 부지에서 저비용 주택의 방향적 배치를 결정하는 데 있어 태양 방향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반 에스테렌은 1929년부터 암스테르담 도시개발부 수석 건축가로 재직 중이었으며, CIAM은 193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 예정인 다음 주요 CIAM 회의를 위해 여러 도시 분석 연구를 준비해 줄 것을 그에게 요청했다. 이 연구들의 주제는 ‘기능 도시’, 즉 토지 계획을 기능-기반 구역에 기반해 수립하는 도시였다.

반 에스테렌은 도시 계획가 테오도르 카렐 반 로후이젠을 고용하여 암스테르담 확장 계획을 위해 개발된 방법을 활용해 도시의 전반적인 미래 발전을 예측할 구획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그는 당시 CIAM이 추진하던 보다 합리적인 방법에 의존했는데, 이는 구역 용도를 세부적으로 설계하기보다는 통계 정보를 활용하여 구역 용도를 설계하려는 것이었다.

1931년 후반 베를린에서 열린 특별 회의에서 반 에스테렌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대한 세 장의 도면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1:10000 축척으로 토지 이용과 밀도를, 두 번째는 교통망을, 그리고 세 번째는 1:50000 축척으로 도시의 지역적 배경을 보여주었다. 그는 주거, 업무, 여가, 교통이라는 네 가지 기능에 대한 보조 자료도 제시했다. 그의 발표를 바탕으로 CIAM 내 각 국가별 그룹이 모스크바 회의에 제출할 유사한 발표 자료를 준비하기로 결정되었다. 표준 표기법 세트가 합의되었다.

1932년, 르코르뷔지에의 소비에트 궁전 공모작은 심사위원단의 승인을 얻지 못했으며,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CIAM의 의제는 점점 더 무시되기 시작했다. 제4차 CIAM 회의를 위한 새로운 개최지가 필요해졌다.


CIAM 4

제4차 CIAM 회의는 1933년 7월 마르세유에서 아테네로 항해 중인 원양 여객선 S.S. 파트리스 호 선상에서 개최되었다.

국가별 그룹들은 자국의 도시 연구 결과를 회의에 보고하면서, 각 사례마다 사전에 합의한 세 개의 패널 형식으로 발표했으며, 총 33개 도시가 제시되었다. 또한, 르코르뷔지에와 앞서 취리히에서 만난 그룹은 기능 도시의 핵심 목표를 명시하기 위한 회의를 주최했다.

8월 3일 아테네에 도착하자마자 아테네국립기술대학교에서 기능 도시 패널 전시가 열렸고, 그리스 총리가 개관을 선언했다. 패널은 대도시, 행정 도시, 항만 도시, 공업 도시, 휴양 도시, 다기능 도시 등 일곱 가지 범주로 구분되었다. 대표단은 며칠 동안 아테네에 머물렀으며, 일부는 현지의 고전 유적을, 다른 이들은 인근 섬들을 방문했다. 8월 10일, 그들은 마르세유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귀항 중 열린 회의에서 대표단은 기능 도시에 관한 결의안에 합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 에스테렌의 오리지널 암스테르담 계획은 더 많은 자원을 바탕으로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각국 대표단이 제출한 계획에는 그런 기반이 없었으며, 기디온의 거듭된 촉구에도 불구하고 대표들은 지침에 합의하기를 주저했다. 결국 두 개의 그룹이 「논평」과 「결의안」이라는 두 개의 별도 문서에 합의했다.


베르톨트 루베트킨의 하이포인트 1. via Wikimedia Commons

아테네 헌장

33개 도시 연구에서 도출된 「논평」은 주거, 노동, 여가, 교통이라는 제목 아래 지침을 마련한다.

CIAM은 주거 지구가 최상의 입지를 차지해야 하며, 모든 주거에 최소한의 일조 기준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위생상의 이유로, 건축물을 교통로를 따라 짓지 말아야 하며, 현대 기술을 활용해 고층 공동주택 동들을 서로 넓은 간격으로 배치해 건설함으로써 지면을 대규모 녹지공원으로 비워 두어야 한다고 했다.
– 『1928-1960, 어버니즘에 관한 CIAM 담론』, 루이스 멈퍼드, MIT 프레스, 2000, p.85

게다가 그들은 산업지대를 주거지와 가깝게 배치하고 그 사이를 넓은 공원과 체육 공간으로 완충하여 통근 시간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로의 폭과 기준은 교통의 속도와 유형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산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존과 관련해서는, 역사적 기념물은 진정한 가치가 있을 때에만 보존되어야 하며, 그 보존이 거주자들을 건강하지 않은 생활 조건으로 내몰지 않아야 한다.

「논평」은 주제프 류이스 세르트(1902-1983)의 저서 『우리 도시는 생존할 수 있는가?』의 기초가 되었으며, 1943년 발간된 르코르뷔지에의 「아테네 헌장」에 포함되었다. 「결의안」은 1935년 발간된 르코르뷔지에의 저서 『빛나는 도시』의 일부를 구성했다.

출판된 형태의 「아테네 헌장」 본문은 『빛나는 도시』의 내용을 확장한 것이 되었고, 르코르뷔지에는 원래의 「논평」을 상당 부분 재서술했다. 그는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는 한편, 초고가 근거로 삼았던 도시 계획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러한 취급 방법으로 「아테네 헌장」은 일반적 가치의 추상적 문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구체적 근거 위에 세워졌던 「논평」의 본래 힘을 변형시켰다. 그 제목과는 달리, 「아테네 헌장」은 10년 전에 열린 CIAM 회의의 상호 합의된 결과물로 볼 수 없으며, 상당 부분 르코르뷔지에 개인의 문제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르트 스탐이 부분적으로 설계한 반넬레 공장. via Wikimedia Commons

전전 영향

CIAM 4 회의는 스위스,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헝가리,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브라질, 캐나다에서 참석한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35년 프랑스에서 『빛나는 도시』가 출간된 후, 르코르뷔지에는 여러 실현되지 못한 계획들을 통해 도시 계획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계속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앤트워프, 파리, 모스크바, 알제, 모로코에 대한 계획들이 포함되었다.

네덜란드에서, CIAM 대표단은 마르트 스탐(1899-1986)이 부분적으로 설계한 반넬레 공장을 방문했는데, 이 공장은 ‘기능 도시’ 설계의 더 큰 부분을 형성할 예정이었다.

CIAM 4는 영국의 영향력 있는 MARS 그룹이 처음으로 참가한 회의였다. 1935년에는 MARS 멤버인 베르톨트 루베트킨과 그의 사무소 텍톤 그룹이 런던 하이게이트에 하이포인트를 완공했다. 이 프로젝트는 평면상 두 개의 십자형으로 묶인 56가구로 이루어졌으며, 각 팔에는 8가구가 배치되었다. 각 세대는 중앙 서비스 코어와 연결되지만 발코니로 이웃 세대와 분리되어, 세대 간 소음 전달을 사실상 없애는 설계 특징을 갖는다.

1937년 제2차 스페인 공화국이 붕괴되자, 세르트는 CIAM의 활동을 집중하기에 영국과 미국이 가장 적합한 장소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전후 영향

「아테네 헌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 계획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그 영향은 더 복잡했는데, 1950년대에 CIAM이 헌장에 기술된 ‘기능 도시’를 다른 <정주 헌장>으로 대체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1946년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 도시) 라로셸 및 생 디에 프로젝트 의뢰를 받았다. 그 도시 계획은 헌장에서 다소 덜 강조되었던 도시적 기념비성을 실험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민센터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배치한 (주거 단지) 유니테 다비타시옹 8동을 제안했다. 비록 이 제안들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마르세유에서는 세 동의 유니테를 검토한 초기 연구 가운데 한 동이 실제로 건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헌장에 부합하게, 그 유니테는 공원 속에 배치된 남북 방향의 18층 건물이었다. 7층과 8층에는 각종 상점, 사무실, 호텔이 들어선 공공 ‘가로’가 있다. 옥상에는 유치원, 러닝 트랙,·수영장이 있다. 이 건물은 1952년에 개관했지만, 완공 이전부터 이미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알턴 주택 단지의 고층 건물들. via Wikimedia Commons
셰필드에 있는 파크힐 주택 단지. via Wikimedia Commons

영국

영국의 1949년 주택법은 지방자치단체가 노동계급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공동체를 위한 균형 잡힌 주택 유형을 공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사회주의적 전후 분위기 속에서, 건축 저술가 J. M. 리처즈는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가 “공원 같은 환경 속에 깨끗하고 건강한 주거를 배치한 것”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1952년부터 1958년 사이, 런던 카운티 의회는 로햄프턴에 알턴 이스트와 알턴 웨스트 고층 주거 건물을 건설했다. 알턴 이스트는 주로 10층 건물로 이루어진 744가구, 알턴 웨스트는 5층, 6층, 12층 건물에 1,867가구로 구성되었다. 두 프로젝트 모두 공원 지대 안에 배치되었으며, 이후 문화재로 등재되었다.

1958년 셰필드에서, 총괄건축가 루이스 워머슬리(1909-1990)가 파크 힐 주택단지를 설계했다. 전면적 슬럼 철거의 산물로, 유니테의 세 배 규모였으며, 여러 동의 고층 구조물을 외부 데크로 서로 연결해 주거를 수용했다. 이들 ‘공중 가로’는 자전거와 우유 배달차가 다닐 만큼 넓었다. 초기에는 성공적이었는데, 새로운 계획에 따라 전체 거리가 인접한 주택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해럴드 맥밀런(1894-1986)은 그것이 “전 세계의 찬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주택부가 지방자치단체들에게 보다 통합적이고 개방적인 계획을 추진하도록 장려했다. ‘기능 도시’ 개념은 공원을 사이에 두어 공업지대와 주거지대를 분리할 것을 규정했다. 이는 스코틀랜드 도시들에서 산업 쇠퇴의 지역 재생에 적합했다. 1956년부터 글래스고의 허치슨타운·고발스 지역이 재개발되었다. 건축가 로버트 매튜(1906-1975)는 지역 가로망을 무시하고 남북 축에 따라 18층 건물을 배치하여 네 구역 중 하나를 설계했다.

런던의 골든 레인 주택 단지는 인접한 바비칸 주택단지를 설계한 챔벌린, 파월, 본이 설계했다. 그것은 다양한 주거 형태와 우수한 커뮤니티 지원 시설을 갖추고 있다. 유니테와 마찬가지로 지붕에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다.

스미스슨 부부(앨리슨 & 피터 스미스슨)은 ‘기능 도시’에서 검토된 네 가지 기능에 반대하며, 이를 주택, 가로, 지구, 도시로 다시 명명했다. 골든 레인 개발에서 주택은 가족 단위, 가로는 고가 접근 데크를 의미했지만, 지구와 도시는 프로젝트 경계 밖에 놓여 있었다. 그들의 작업은 골든 레인에서 지어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들의 저서 『어번 스트럭처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루시우 코스타(1902-1998)가 구상한 브라질리아 계획은 이 도시를 ‘기능 도시’ 개념의 발현으로 보았다. 르코르뷔지에의 빌 라디외즈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브라질의 새 수도에 질서, 진보, 안정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르코르뷔지에와 같이, 코스타와 오스카 니마이어는 평등과 정의를 바탕으로 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기능 도시’의 변형으로서, 세르트는 1964년 하버드대학교를 위해 기혼 학생 주거를 설계했다. 피바디 테라스로 알려진 이 단지는 잔디밭과 차양으로 보호된 보행 동선 속에 배치된 세 개의 주요 타워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타워와 잔디 사이의 스케일을 단계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저층부의 흔한 공허감을 피했다.

나머지 세계

1957년 일본에서 마에카와 쿠니오(1905-1986)는 유니테 개념을 바탕으로 도쿄의 하루미 아파트 단지를 설계했다. 한편, 1963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CIAM 회원 야프 바케마(1914-1981)는 르코르뷔지에의 알제리 계획을 바탕으로 ‘기능 도시’ 제안을 설계했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아이고우 주택 계획. via Wikimedia Commons

비판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아이고 주택 단지는 ‘기능 도시’를 위한 CIAM 이념에 따라 설계되었다. 그것은 14층 건물들로 이루어졌으며, 1951년 준공 당시 미국건축가협회(AIA) 상을 받았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찰스 젱크스(1939-2019)는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32분, 프루이트–아이고 단지가 다이너마이트로 철거되던 순간을 근대 건축의 죽음이라고 선언했다.

건축 비평가 레이너 밴햄(1922-1988)은 헌장이 내세우는 보편성이 사실은 건축과 도시계획에 대한 매우 협소한 관점을 가려 버려 CIAM 멤버들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고 우려했다. (또한) 넓은 녹지 속의 고층-고밀 주택에 대한 강조는 도시 주택의 다른 대안들에 대한 연구를 사실상 사장시켰다(고 지적했다).

도시 계획의 측면에서 볼 때, 헌장은 도시계획을 위한 경직된 기하학을 설정했으나, 점차 도시의 이미지에 보다 유기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이웃’, ‘군집’, ‘연계’ 같은 용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1954년 CIAM의 엑상프로방스 회의에서조차 젊은 세대는 헌장이 표상하던 전쟁 이전의 유토피아적 이상에 격렬히 반발했다. 이러한 환멸은 CIAM의 두브로브니크 회의에서 팀 텐(Team X)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끝내 이 회의(CIAM)가 조직으로서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브라질리아의 경우, 오스카르 니에메예르는 조닝(지대 설정)과 녹지 공간이라는 아이디어에는 충실했지만, 그가 수정한 도시 유토피아는 보행자 시설을 강화하고 인구를 수직적으로 고밀 집중시키는 더 소규모의 도시를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1958년에 그는 자신의 유토피아적 꿈은 사회 자체가 그에 맞게 재조직되지 않는 한 실현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도시가 출범할 당시에는 카프카적(부조리하고 암울한) 악몽이자 오웰적(전체주의적인) 환경이 결합된 곳으로 낙인이 찍혔다.

공동 시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문제를 고밀로만 귀결시키려 든 것은 재앙을 자초한 일이었고, 녹지 없는 열린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자연 속 공동체 생활이라는 발상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 유니테를 모방한 사례들은 대개 이처럼 극단적인 생략을 수반했다. 그렇다면 그 프로토타입이 뒤이은 참담한 변종들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일까?
ㅡ 『1900년대 이후의 근대 건축』, 윌리엄 J. R. 커티스, 파이돈, 1986


최근 역사

2003년 유럽공간계획위원회는 이 헌장의 새 버전을 작성했다.


잡학 지식

J. G. 밸러드의 책 『하이 라이즈』는 런던 중심부의 다른 고층 빌딩들과 함께 공원 내 위치한 40층짜리 건물을 배경으로 한다. 10층에는 슈퍼마켓, 상점, 체육관, 수영장이 있는 넓은 중앙홀이 있다. 35층에는 작은 수영장, 사우나, 레스토랑이 있다. 부유한 세입자들이 파괴의 향연을 벌이는 가운데, 밸러드는 건물 전체가 서서히 혼란으로 빠져드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출처(텍스트): “Athens Charter”, Wikipedia(영문), 2024-10-24 버전 · 영구 링크 · 역사

저자: Wikipedia 기여자들 (역사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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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건축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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