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민주주의의 다음 과제 : 세력균형론과 절차준수론 이후

이중용 건축편집자

1987년 민주 항쟁의 결과가 노태우 정권이었다는 사실이 어떤 이들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독재를 꿈꾸는 빌런들의 욕망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확실히, 민주라는 것이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쟁취 가능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공인된 폭력이 권력의 휘하에서 작동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상의 한계로 인해 여전히 권력을 쥐는 쪽이 막대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간혹, 예를 들면 촛불집회에서 보듯, 권력이 시민과의 세력 균형을 무시하고 선을 넘을 때, 그들이 가진 폭력의 무게가 어떠하든 시민의 명령이라는 무게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이 더러 확인되곤 했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그런 식으로, 일종의 세력 균형의 문제로 첫 고비를 넘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1.0 버전은 ‘최대 다수’에 의미를 두는 공리적 입장, 그리고 민주주의를 포함하여 기존에 상정된 정치 체제들이 내포하는 근본 가치관인 ‘주(主)’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행해진, 지극히 산술적이면서 경쟁적인 구도 안에서 쟁취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의 한계는, (그것의 산술적이면서 경쟁적인 특징으로 인해,) 폭력의 용량이 시민의 용량을 넘어설 가능성이 엿보일 때, 동시에 권력에 의한 폭력이 재개될 가능성 또한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슬로건, 다시 말해, 민(民)이 주(主)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권력을 더욱 꼼꼼히 살피고 조직화로 극복해야 한다는 강령은, 민주주의 1.0 버전이 작동하는 세력균형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 스스로 부과해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이었다. (거기에서 시민은, 폭력 혹은 폭력성의 용량을 계산하고 시민 혹은 시민성의 용량을 그 이상으로 만들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 폭력의 형태가 ‘무력’에서 ‘절차’로 전이되면, 소위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시스템론에 경도된 진보 세력조차 절차에 갇혀 무력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폭력은 욕망처럼 투명해서 너무나도 잘 보이고, 또한 그 결과가 시민에 대한 권리 침해의 뚜렷한 증거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시스템 내에서는 당위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한 ㅡ 오직 그에 대해서만 ㅡ 시민의 폭력 혹은 세력화가 한시적으로 당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절차 준수의 문제로 넘어가면 상황은 매우 복잡해진다. 시민이 맞서야 할 권력의 대표는 홀로그램처럼 존재하고, 그 실체는 제도 곳곳으로 분산되어 한눈에 파악되지도, 한 번에 붙잡히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욕망 아래 규합된 대상들이 아니라 (그중 하나가 제거되어도 필요에 따라 자가 재생하고 증식하는) 결집된 개별 욕망들의 네트워크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절차의 복잡함과 불투명함으로 인해 시민이 절차로부터 소외되면, 시민의 정당성이 시민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이를 대표하는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따라서 시민 외부의 억압과 다르면서 다르지 않은 시민 내부의 억제 과정이 형성되는 폐단 또한 함께 발생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적’이라는 가상이 형성될 여지를 만든다.)

시민 주권은, 분명 과거에는 보편적 주권의 형태로 쟁취되었지만, 절차의 준수를 들고 등장하는 권력은 이를 개별적인 개인의 정의로 분쇄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상징적인 개인들의 도덕성을 광장에서 심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와해된 민심을 틈타 주권의 문제를 정의의 문제로 도치시킨 후, 자신들이 바로 그것과 대결하는 또 하나의 정의라는 이미지로 권력의 재정립을 시도한다. 시민 주권이 곧 정의이기도 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이 상황을 혼란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반대로 정의가 항상 시민 주권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 ㅡ 독재가 시민에게는 불의였지만 독재자 개인에게는 정의였던 것처럼 ㅡ 은 슬그머니 감춰진다. 언론은 조잡해지고, 언로는 불투명해지고, 토론은 엉망진창이 된다. 모든 것이 자신의 개별 정의를 부르짖으며 마치 민주적인 시스템 아래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혼란만 부추길 따름이며, 어렴풋하게 포착되는 것은 절차만이 재깍재깍, 무감각한 시계바늘처럼 기계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 주권의 가치가 상기시키는 것, ‘국가를 위한 시민’에서 ‘시민을 위한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확고한 인식 ㅡ 대한민국 헌법 제1조 ㅡ 에도 불구하고, 절차준수론의 세계로의 전환을 꿈꾸는 권력은 주권의 문제를 정의의 문제로 탈색시킴으로써 시민 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전제가 일시적으로 가려지는 순간을 얻는 한편, 절차의 초기 과정을 ‘민주적으로’ 혼탁하게 하면서 빠르게 절차 투쟁으로 진입하여 셀프-정당성과 통제 권한의 확보를 획책한다. 여기서 법은, 시민들 사이의 최소한의 윤리로 다루어지기보다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효과적인 통치 기술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아무리 민주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 민주주의 초기 단계에서 주권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시민과 독재자의 대결이, 국부(國富)라는 공익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시민과 사익-집단의 대결로 전환되는 것에 불과하며, 시스템 장악 시도가 병행된다는 점에서 독재적 성격을 답습하게 되고, 바로 그 독재적 성격으로 인해 절차준수론은 이전의 세력균형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세력균형론에서의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봉착하는 절차준수론 역시, 자연스럽게 활용가능한 폭력 또는 시민의 용량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또 다시 이전의 세력균형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국에는 시민들이 원하는 결론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이란 단순히 보면 용량의 대결이기도 하지만, (사적인 그리고 공적인 자유를 향한) 인간 의지는 순간의 승패와 무관하게 시민과 더불어 살아있고, 그것의 살아있음을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승리가 시민에게 있기 때문에, 따라서 오히려 시민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당장 해소해야 할 문제처럼 보이는 절차적 정당성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는 것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통해 확보한 ‘시민 주권’이라는 기초 전제를 어떻게 더욱 강화할 것인가라는 장기 과제를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1987년 헌법 ㅡ 그 후 오늘날까지 변함 없는 바로 그 헌법 ㅡ 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식화되었다. 그것은 이미 완료된 사실이기 때문에, 위기는 있을지언정 퇴보는 없다.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로 느껴질 정도의 사건들이라는 것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새로운 독재 체제의 수립 같은 민주주의 체제와 맞서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악스러울 정도의 개인적인 이익에 대한 집념, 그리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에 의해 부여되어 적절히 대의되어야 할 권한을 당연히 누려도 되는 개인의 권력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마인드 등, 민주주의 시스템 안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개인의 정의에 기반하여 사회를 도구화하려는 허망한 시도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에 의해 나타났다기보다는 민주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최대 강점이면서 동시에 최대 결점인, 기본적으로 개인의 욕망과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시민 주권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민주주의가 완벽한 이상 혹은 총체적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 또한 다른 정치 체제와 마찬가지로 정치 주체를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수와 절차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소수와 절차-접근성이 떨어지는 이들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과도한 사익 추구자들이 마치 민주주의의 적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문제를 놓고 또 다시 한 판 승부를 기획하지만, 사실상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20세기를 주도한 세대들에 의해 완수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작금의 현실에서, 피아를 막론하고 그 의도가 어떠하든 외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이가 있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모든 투쟁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울타리 내부가 아니라 민주주의 너머 혹은 이후를 향한 것으로 전면 재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치 주체〉를 중심으로 마련된 기초 ㅡ 민주주의 ㅡ 위에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정치 목적〉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집에 대해 구상하고 짓는 시도를 하는 일이, 직면한 개인의 현실 외에 더 이상 해결할 것이 없어 보이는 오늘의 세대에게 남겨진, 보이지 않는,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작성 : 202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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