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양풍 건축


의양풍 건축(기요우후우켄치쿠)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에서, 주로 근세 이후 기술을 익힌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들이 설계·시공한 건축을 말한다. 종래의 목조 일본건축에 서양 건축의 특징적 의장이나, 때로는 중국풍의 요소를 혼합하여, 서민들에게 문명 개화의 숨결을 전달하고자 각지에 건설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의양풍 건축은, 메이지 10년 전후에 피크(절정)를 맞이하고 메이지 20년 이후 사라졌는데, 그 시기가 문명개화와 맞물려 있다.

구 카이치학교의 포치와 탑옥. via Wikimedia Commons
니시키에에 묘사된 츠키지호텔관. via Wikimedia Commons
야마가타현에 지어진 의양풍의 관청 거리. via Wikimedia Commons

개요

메이지유신 이후, 호텔, 서양식 공장, 초등학교, 관공서, 병원 등 새로운 기능을 갖춘 시설들이, 처음에는 대도시에 그리고 머지 않아 전국적으로 요구되기 시작했다. 서양적인 기능을 갖추며 견뢰성(견고함)이 요구된 이들 시설은, 서양식 건축으로 지어질 필요가 있었다. 영빈관이나 조폐국 등 주요 시설은 고용(된) 외국인의 손에 설계·감리를 맡겼으나, 기타 관청사나 지방의 시설은 지역 목수의 손에 맡겨졌다.

하지만, 목조건축의 전통으로 육성된 일본의 목수들에게, 돌에서 유래한 서양식 건축(조적조)은 미지의 존재였다. 건축 양식은 고사하고 그 용도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전통 기술을 익힌 목수들은, 전통의 측면에서 서양식 건축을 해석하고 곁눈질로 흉내내어 서양식 건축을 건설한다. 니시키에1나 실물의 견문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지어진 의양풍 건축은, 당시 우연히 접한 건물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절충이나 창조가 더해져, 탑옥(누각)이나 포치(현관) 등 대략적인 형태는 공통적이면서도 건물마다 다른 디자인이 생겨났다.

요코하마의 서양식 건축을 참고하여 도쿄에서 태어난 의양풍 건축은, 다수의 니시키에에 묘사되어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야마나시, 야마가타 등 구(舊) 정치 체제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정부에서 토목현령이라 불리는 민완 지도자를 파견하여, 식산흥업정책(메이지 정부의 신산업 육성 정책)과 병행하여 의양식 건축으로 공관 지구를 새롭게 건설했다. 또한, 폐불훼석(불교를 배척하고 절·불상을 부숨)에 의해서 해체된 절터에는 초등학교가 지어졌다. 의양풍 건축은, 문명개화의 상징인 동시에 지배체제의 전환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기도 했다.


역사

요코하마의 화양절충건축

막부 말기의 일본에 온 외국인 상인들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에서 친숙해진 생활 양식을 영위하기 위해 외국인 거류지에서도 베란다를 둘러친 건물을 지었다. 그들은 간단한 건축도면을 일본인 목수에게 보여주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었기 때문에, 커다란 기와지붕의 일본풍 건물이 출현했다. 이 예로서 로레이로(포르투갈 영사 호세 로레이로) 저택(덴토상회대리점, 1862년, 시미즈 키스케), 영일번관(1863년), 프랑스해군병원(1865년), 프랑스군주둔소(1864년경), 헵번(미국 선교사. 최초의 일영 사전 편찬자) 저택 등을 들 수 있으며, 화양절충이라고는 하지만 일본풍인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1866년 돼지고기 요리점 화재 사건(부타야카지)로 인해 이들 건물이 소실되고, 거류지의 도시적 정비의 진전이나 외국인 기술자의 등장에 따라, 내화성능을 중시한 건물로 대체되어 갔다. 1867년에 개항한 고베에서는 처음부터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세워졌고, 요코하마와 동시에 개항한 하코다테도 개척사(메이지 초기 홋카이도 행정·개척을 맡은 관청)가 미국계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서양식(양풍) 경향이 강해져 간다. 외국인 거류지 개설 초기부터 요코하마에서는 일부 건물(영국 영사관 유치장 등)에 목조석첩(목구조에 돌 붙임)구법이 사용되었으나, 돼지고기 요리점 화재 사건 이후, 간편한 내화피복으로 나마코카베(외벽에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것들의 틈 사이를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가 더 유행했다.

프랑스해군병원, 1865. via Wikimedia Commons
프랑스군 주둔소, 1864. via Wikimedia Commons

시미즈 키스케의 건축

개항과 동시에 요코하마에 점포를 연 목수이자, 초대 시미즈 키스케(시미즈 건설 창업자와 그 데릴사위가 자칭한 이름)의 뒤를 이어 막부가 공인한 4명의 청부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2대 시미즈 키스케는, 1862년에 로레이로 저택을 짓고, 그 후 미국인 건축기사 리처드 퍼킨스 브리젠스(1819~1891)와 함께 일하면서 서양건축을 배워, 영국 임시 공사관을 시공했다. 이후, 시미즈 키스케는, 도쿄에 츠키지호텔관(1868)과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1872)의 두 큰 서양식 건축물을 지었다.

츠키지호텔관(1868)은, 구 막부 시대에 계획된 외국인 전용 호텔로서 브리젠스가 기본설계를 담당했다. 전면에 나마코카베를 온통 둘러치고, 중앙에 단계별로 차례로 줄어드는 3층탑을 두고 있다. 탑옥(옥탑에 지은 작은 시설물)에는 화두창(카토우마도)을 내고,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아매고, 석조 아치의 정문에는 키바나(들보 따위의 끝이 기둥 밖으로 내민 부분)를 달았다. 나마코카베는 브리젠스의 기본설계에 있던 것이지만, 세부의 일본식 의장은 시미즈 키스케에 의한 것이다.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는, 미쓰이 조직이 새로 창설한 은행을 위한 건물이다. 목골석조(목재-뼈대 석재-벽체)에 베란다가 붙은 서양식 2층으로 된 건물 골조에, 복잡하게 접은 겹겹이 쌓인 지붕이 얹혀 있다. 지붕에는 당파풍(중앙은 활꼴이며 양끝이 곡선형으로 된 박공 종류)·천조파풍(지붕의 흐름 면에 붙는 파풍의 일종)을 설치하고, 사각형·팔각형의 탑을 겹겹이 쌓고 있다. 더욱이 그 양쪽에는 작은 탑까지 놓여 있다. 초기의 안에서는 보통 지붕의 오소독스한(정통의) 서양식 건축이었으나, 미쓰이 조직의 희망으로 이러한 무국적 디자인이 되었다.

의양풍 건축의 시발점이 된 이 두 건물은, 순식간에 도쿄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고, 다수의 니시키에에 묘사되어 일본 전역에 널리 퍼졌다. 지방에서 구경 온 사람들 중에는, 카시와데(신을 배례할 때 양손을 마주쳐서 소리 내는 일)를 두드리거나 새전(신불에 참배하여 올리는 돈)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시미즈 키스케는 또한, 제일국립은행에 강제로 양도된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를 대신할 스루가쵸-미쓰이구미(1874)도 지었다.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와 달리 단정한 서양식 건축이지만, 옥상에는 샤치호코(용마루 양단에 장식하는, 머리는 호랑이 같고 등에는 가시가 돋친 물고기 모양 장식물)가 자리잡고 있어, 이쪽도 니시키에의 소재가 되어 있다.

츠키지호텔관, 1868. via Wikimedia Commons
카이운바시-미쓰이구미. via Wikimedia Commons
스루가쵸-미쓰이구미, 1874. via Wikimedia Commons

하야시 타다히로의 목조관청건축

요코하마에서 유래한 서양식 건축을 도입한 목수로는, 시미즈 키스케 외에 하야시 타디히로가 있었다. 대장장이, 톱질꾼을 거쳐 목수로 전향한 하야시 타다히로는, 요코하마에서 브리젠스, 휘트필드, 도슨 등 서양인 기사 밑에서 일하며 영국 임시 공사관의 공사에도 참가했다. 그 후, 1871년 말에 발족한 공부성에 고용되어, 관청 건축의 영선을 담당했다. 1873년에는 고용 외국인 토머스 제임스 워터스(1842~1898)가 통솔하는 대장성 영선요로 옮겨, 일본인 기술자의 필두(선두주자)가 된다. 워터스가 벽돌과 돌의 본격적인 건축을 맡아서 하는 동안, 하야시 타다히로는 대장성(1874), 내무성(1874), 고베하가시 세관관청(1873), 우체국(1874), 대심원(최고 재판소, 1877)과 같은 목조 관청사를 맡았다.

대장성. via Wikimedia Commons
내무성. via Wikimedia Commons
우체국. via Wikimedia Commons
대심원. via Wikimedia Commons

건물의 내용을 보면, 브리젠스나 시미즈 키스케와 같은 목골석조가 아니라, 보통의 벽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아치나 코너스톤(모퉁이돌)에만 돌을 붙이는 목골석조의 생략형이다. 건물의 모습도, 일본식 지붕을 얹거나 탑을 세우거나 하지 않고 단조로운 사각형 안에 담았으며, 유일하게 페디먼트와 열주가 붙은 커다란 포치(현관)가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에는 팔라디아니즘을 선호한 워터스의 영향이 보인다. (이것들은) 의양풍의 건축 표현으로는 얌전하지만, 중앙 관청의 건축이라는 점에서 지방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며, 포치만을 강조한 팔라디아니즘 붕괴의 구성은 지방 관청의 정형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목조-회반죽의 초등학교

학제(일본 최초의 근대적 학교 제도를 정한 교육법령) 공포를 기점으로, 초등학교뿐 아니라 군청, 현청, 경찰서 등 지방의 공공건축도 서양식화를 요구받게 된다. 각지의 도편수(우두머리)는 도쿄,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에서 의양풍이나 베란다콜로니얼의 서양식 건축을 보고 듣고, 고향에 초등학교나 관공서를 지었다. 목골석조계의 의양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 목조 회반죽 마감의 의양풍은, 중부 지방의 나가노, 야마나시, 시즈오카의 3개 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활기를 띤 곳은 야마나시로, 현령 후지무라 시로(1845~1908)에 기인하여 후지무라식 건축이라 불리는 일련의 의양풍 건축이 지어졌다. 후지무라 시로는 야마나시 부임 전에, 초등학교 발상지인 교토를 거쳐, 오사카에서 의양풍의 초등학교 건설을 추진한 인물로, 타쿠미학교(1874)와 료오보쿠학교(1874)를 시작으로 다수의 의양풍 건축을 지었다. 정육면체의 주체부에 태고루(북을 달아맨 누각)를 얹은 형식을 가진 초등학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타쿠미학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오사카의 토다이구미 제19구 초등학교(1873)나 시가현 나가하마의 카이치학교(1874)가 지어졌다는 점에서 이 형식의 발원지는 오사카로 추정된다.

타쿠미학교. via Wikimedia Commons
료오보쿠학교. via Wikimedia Commons
토다이구미 제19구 초등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카이치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야마나시에 이어, 시즈오카에는 미츠케학교(1875)나 호우츄학교(1875), 니시노시마학교(1875)가, 나가노에는 나카고미학교(1875)나 카이치학교(1876)가 지어졌다. 카이치학교는 설계에 있어 도쿄나 야마나시의 의양풍을 참고하여, 뒤이어 지어진 스와 분지의 타카시마학교(1879), 산 하나 건너의 카쿠치학교(1878), 이웃 마을의 야마베학교(1885) 등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선진지(다른 곳보다 발전이 앞서거나 진보한 지역)에 세워진 초등학교는 주변 지역에 영향을 주어, 목조 회반죽 계열의 의양풍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미츠케학교. via Wikimedia Commons
호오츄학교. via Wikimedia Commons
니시노시마학교. via Wikimedia Commons
나카고미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카이치학교. via Wikimedia Commons
타카시마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야마베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시타미이타의 의양풍

회반죽 계열의 의양풍이 절정을 맞이할 때쯤, 시타미이타(외벽널, 물막이판자)에 페인트를 칠해 마무리하는 의양풍이 등장해, 의양풍의 말기에 널리 퍼졌다. 시타미이타 계열의 의양풍은 야마가타와 도쿄에서 시작됐지만, 질과 양에서 영향력은 야마가타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야마가타에서는 초요오학교(1876)를 시작으로, 현청사(1877), 사범대학(1878), 제생관(병원, 1879)과 같은 큰 작업이나 지역 내 니시다가와군청(1881), 쓰루오카경찰서(1884) 등이 지어졌다. 건설 러시는 1876년부터 1881년까지 5년간 지속되었고, 지어진 건물은 주요한 것만 28건에 이른다. 삿포로와 쓰루오카 사이에서 기술 교류가 있었던 야마가타에서는, 개척사로부터 시타미이타의 서양식 건축이 전해져 이러한 의양풍 건축이 지어졌다. 건설을 주도한 현령 미시마 미치쓰네(1835~1888)는 전임처에서도 후쿠시마의 다테군청(1883)이나 미나미아이즈군청(1885), 토치기의 현청사 등 시타미이타의 의양풍 건축물을 계속 지었다.

쵸요오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야마가타현청사. via Wikimedia Commons
야마가타사범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제생관. via Wikimedia Commons
니시다가와군청. via Wikimedia Commons
쓰루오카경찰서. via Wikimedia Commons
다테군청. via Wikimedia Commons
미나미아이즈군청. via Wikimedia Commons
토치기현청사. via Wikimedia Commons

도쿄에서는, 공부성(1874)이 시타미이타의 의양풍 제1호지만 한동안 후속이 없었고, 1877년(메이지 10년)이 되어서야 학습원(1877), 고마바농학교(1877), 히토쓰바시강당(1877), 원로원(1878) 등이 지어졌다. 이들은 대장성 영선요에 의한 것으로, 목골석조 계열을 짓고 있던 중앙 관청의 기술진은 메이지 10년에 접어들면서 시타미이타 계열로 전환했다.

공부성. via Wikimedia Commons
학습원. via Wikimedia Commons
고마바농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원로원. via Wikimedia Commons

전통의 목조기법으로 용이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일본의 풍설에도 강한 시타미이타의 의양풍은 메이지 10년대에 걸쳐 도호쿠 3현과 도쿄에 뿌리를 내린 후, 메이지 20년대에 들어 일본 열도 전역에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관이나 의원 등 전국에 남아 있는 시타미이타의 간편한 서양관은, 이 시타미이타 의양풍의 후예다.

의양풍의 종언

오리지널리티 높은 건축물이 만들어졌던 의양풍 건축이지만, 메이지 10년대 후반이 되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탑옥이 없어지고, 우진각 지붕 형식 2층 건물의 동 중앙에 삼각 페디먼트를 얹은 2층 포치를 마련하는 형식이 일반화되어간다. 혼조경찰서(1883), 히카미군 각 읍면 쿠미아이리츠고등소학교(1884), 우와지마경찰서(1884) 등 지역적 편향 없이 같은 시기에 이러한 형식의 건축이 지어졌다. 정보 부족으로 인해 다양성을 낳았던 의양풍 디자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보가 증가하여 정형화되어간다.

혼조경찰서. via Wikimedia Commons
히카미군 각 읍면 쿠미아이리츠고등소학교. via Wikimedia Commons
우와지마경찰서. via Wikimedia Commons

관청사의 건축 형식이 표준설계화되어간 것도, 정형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 부현청사 건설비가 국비로 지원되면서, 신축 시 국가의 심사가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내무성 청사의 형식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 형식이 평준화된다. 1881년 7월에 공사 비용이 지방 부담으로 변경되는데, 이 무렵부터 관청사 설계에 건축가가 관여하게 되었고, 의양풍의 시대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건축도, 1877년 전후부터 각 현에서 학교건축법이 제정되면서, 학교건축에 계획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1890년에는 초등학교 설비준칙, 1895년에는 학교건축도 설명 및 설계대요가 제정되어, 이전까지 각 부현에서 지도하던 학교건축이 정부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도받게 되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의 평면은 편복도의 동을 여러 동 늘어놓은 형식으로 수렴되어간다. 또한, 일본풍 교사에 비해 공사 비용이나 수선비가 높다는 점에서 의양풍 교사의 건설이 회피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초등학교 건축에서 디자인 의식 자체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게다가, 1887년(메이지 20년)경부터 의양풍 건축에는 다양한 개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방(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해 일본 기후에 맞지 않는 베란다는 창호를 끼워 실내화했고, 처마가 얕기 때문에 벗겨지기 쉬운 회반죽 벽은 시타미이타로 덮었다. 의양풍의 최대 특징인 탑옥이나 포치도, 보다 본격적인 서양건축에 접근하기 위해 철거 혹은 개편되어갔다.


평가

의양풍 건축은 당시 ‘서양조’나 ‘양풍가조’, ‘西洋型家屋ニ模’한 것, ‘양풍 모조’ 등으로 불렸다. 동시대부터 ‘모조(모방)’로 인식되었지만, 이는 본래 석조, 벽돌조로 지어야 할 것을 목조로 대체한 것, 즉 양식상의 모조가 아니라 구조상의 모조로 인식되었다.

메이지 10년대 후반 이후, 코오부대학교(공부성 직할 대학)를 졸업한 일본인 건축가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양건축을 직사(있는 그대로 묘사함)한 건축이 지어졌다. 여러 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고자 했던 메이지 정부에게, 근대화란 성급한 서양화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메이지 초기의 의양풍 건축은 양식적 정확성을 결여한 부끄러운 것으로 단죄된다. 비판 속에서 의양풍 건축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모조의 대상도 구조에서 양식으로 바뀌었다.

다이쇼 시기가 되면, 메이지 시기의 서양식 건축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건축가들이 자신의 표현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이 시기(에), 의양풍 건축도 독창성의 발로로 높이 평가받았다.

전후, 의양풍 건축에는 ‘미요-미마네(눈썰미; 보고 흉내내는 중에 저절로 터득함)’라는 평가가 상투적인 문구처럼 따라붙게 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메이지 건축의 본격적인 연구에서도, 콜로니얼 스타일의 서투른 모방으로 자리매김했다. 1960년대부터 의양풍 건축의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양식보다는 근대화에 공헌한 문화적 의의가 그 평가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모방에만 그치지 않는 독창성이 풍부한 건축이라는 적극적인 평가가 부활한다. 이후 전문가들은 ‘의양풍’이라는 말이 가짜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을 싫어하여, 다른 말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용어의 유래

쿠로다 토모노부(1885~1967)가, 1915년의 사진집 『도쿄 100 건축』에서 내무성 청사에 ‘의양식’이라는 양식명을 붙였는데, 이것이 양식으로서의 의양풍 건축을 지칭한 최초의 사용 예이다.

그 후, 다이쇼 시기 이후의 메이지 서양식 건축의 재평가에서 기초적인 자료 수집을 했던 호리코시 사부로(1903~1982)가 「서양식 모방건축 60년기」(『건축과 사회』, 1930.6.)와 「메이지 시계대기(7권)」(『일본건축사』, 1931.5.)에서,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과 대비되는 말로써 ‘의양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전후에도 계승된다. 세키노 마사루(1909~2001)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일본 근대건축 통사 『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건축』(『세계미술전집』 제25권, 1951)이나, 아베 키미마사(1921~2004)의 「메이지의 건축」(『메이지 문화사』 제8권, 1956)에서, 하야시 타다히로로 대표되는 일본인 기사가 제작한 건축을 ‘의양풍 건축’이라고 부른다.


현존 건축 일람

2003년 시점에서 현존하는 주요 의양풍 건축 목록. → 해당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것.


일본 이외의 사례

19세기 후반, 유럽 여러 국가들은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각지에 거류지를 두었다. 하지만, 1843년 개항 직후의 상하이에서는 중국풍의 팔작집 지붕을 씌운 강해관 등의 의양풍적인 건물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 중국·한반도에서는 건축의 의양풍화를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초입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중화바로크라고 불리는 일군의 의양풍적인 건축이 지어졌고, 한국에서도 덕수궁 안에 베란다콜로니얼의 서양식 건축이 지어졌다. 이것은, 일본과 달리 중국이나 한반도에는 이미 석조건축이나 입식(의자 사용)이 존재해, 서양건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양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강해관. via Wikimedia Commons
하얼빈 부가전의 중화바로크. via Wikimedia Commons
한국 덕수궁 정관헌. via Wikimedia Commons

  1. 니시키에(にしきえ; 錦絵) : 풍속화를 색도 인쇄한 목판화(민중서림 엣센스 일한사전). 에도 시대 중기에에 확립된, 우키요에 판화의 한 형태(ja.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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