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토목」의 어원에 대하여

필자 : 오지마 토시오 와세다대학 명예교수

筆者 : 尾島俊雄, 1937-

번역 : 이중용 건축편집자

翻訳 : 李仲鏞, 1974-

조몬사회연구회의 히나모토 씨로부터 마쓰우라 선생에게 토목의 어원을 묻는 메일이 있었다.

縄文社会研究会の雛元氏から松浦先生に土木の語源を問うメールがあった。

토목과 마찬가지로 건축의 어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언젠가 이를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021년의 나의 견해는, “Civil Engineering”을 처음으로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토목공학」으로 번역하고, “Architecture”를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도 누구인지 모르지만 「건축」으로 번역했다. 다만, 그 역어가 맞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초기에 이 역어를 보급한 사람은, 건축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도쿄 대학의 초대 건축역사 교수인 이토 주타(伊東忠太)이고, 토목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토목학회 식전(式典)에서, 기원전 2세기경에 기록된 『회남자(淮南子)』에 의거하여 명명되었다고 북대(홋카이도 대학) 총장 탄보 노리히토(丹保憲仁) 교수가 이야기하여, 보급된 듯하다. 또, 와세다 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 토목학과의 교수가 된 나이토 히로시(内藤廣) 군도 「토목」과 「건축」의 어원에 관심을 갖고 알아보고 있는 듯하다.

土木と同じ建築の語源についても諸説あり、いつかこれを明確にしておくことが必要と考えていた。2021年の私の見解は、“Civil Engineering”を初めて日本語に訳した人は誰かわからないが「土木工学」と訳し、“Architecture”を日本語に訳した人も誰かわからないが「建築」と訳した。唯、その訳語が正しかったかどうかわからないが、明治の初期にこの訳語を普及させた人は、建築については、間違いなく東大の初代建築史教授であった伊東忠太であり、土木についてもよくわからないが、土木学会の式典で、紀元前2世紀頃に記された『淮南子』に基づき命名されたと北大総長の丹保憲仁教授が話され、普及したようである。又、早大建築学科を卒業して、東大土木工学科の教授になった内藤廣君も「土木」と「建築」の語源に関心をもって調べているようだ。

도쿄 대학 건축학과는, 초기에는 조가학과로 칭했고, 일본건축학회도 창설기에는 조가학회였다. 토목학회는 공학회 출신 아니던가.

東大の建築学科は、初期は造家学科と称し、日本建築学会も創設期は造家学会であった。土木学会は工学会からではなかったか。

언어는 시대의 생활·문화와 함께 바뀌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보통이며,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중국어의 건축이나 토목의 용어도, 일본어 번역을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言葉は時代の生活・文化と共に変わり、何故そうなったかについてはよく分からないのが普通で、今日使っている中国語の建築や土木の用語も、日本語の翻訳を活用したものと考えられる。

어쨌건 간에, 메이지 유신, 일본이 구미 문화의 수입에 열심이었던 시대의 역어로, 언젠가 이 말이 정착이 돼서, 나아가서는 일본 독자적인 건축이나 토목의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덧붙여서, 에도시대의 건축에 상당하는 말은 「作事(작사)」(さくじ [발음]사쿠지; [일본어 뜻] 토목·건축 따위의 공사)이며, 토목은 「普請(보청)」(ふしん [발음]부신; [일본어 뜻] 건축·토목 공사; 본디, 불교에서 널리 시주를 청하여 불당이나 탑을 건축·수선하는 일)이라고 칭하였던 듯하다.

いずれにしろ、明治維新、日本が欧米文化の輸入に熱心であった時代の訳語で、いつかこの言葉が定着し、更には日本独自の建築や土木の文化が生まれていると考えてよかろう。ちなみに、江戸時代の建築に相当する言葉は「作事」であり、土木は「普請」と称していたようだ。

이상, 내 멋대로 Blog에 적고 싶었지만, 만약을 위해, 용어를 잘 아는 마츠우라 시게키(松浦茂樹) 선생님과 타카하시 노부유키 선생님에게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고 메일(을)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수십 쪽의 조사 자료가 날아왔다. 너무나 다양한 설명이 있었으므로 약기(줄거리만 따서 대충 간략하게 적음)하고, 양 선생님의 양해를 얻을 수 있으면, 내 Blog에 인용하기로 했다. 덧붙여, 수중에 있던 이토 추타의 책을 읽고, 언어의 정의는 시대와 함께 변해가고 있음을 실감함과 동시에, 내가 전문으로 하는 「도시환경」이라고 하는 말도, 최근 30년간에 많이 바뀌어 왔다.

以上、私の勝手なBlogに記したいと考えたが、念のため、用語に詳しい松浦茂樹先生と高橋信之先生に教えてほしいとメールした。数日して数十頁の調査資料が送られてきた。余りに多様な説明があったので略記して、両先生の了解を得られれば、私自身のBlogに引用させて頂くことにした。なお、手元にあった伊東忠太の書物を読んで、言葉の定義は時代と共に変わっていくことを実感すると共に、私の専門とする「都市環境」という言葉も、この30年間でずいぶん変わってきた。

① 이토 추타 저 『일본 건축의 미』(1944년 6월, 츠키지쇼텐)
② 이토 추타 저 『목편집』(1948년 5월, 반리카쿠쇼보)
③ 기시다 히데토 지음 『건축학자 이토 추타』(1954년 6월, 켄겐샤)
④요미우리신문사편 『건축 거인 이토 추타』(1993년 7월, 요미우리 신문사)

①伊東忠太著「日本建築の美」(昭和19年6月、築地書店)
②伊東忠太著「木片集」(昭和3年5月、萬里閣書房)
③岸田日出刀著「建築学者 伊東忠太」(昭和20年6月、乾元社)
④読売新聞社編「建築巨人 伊東忠太」(平成5年7月、読売新聞社)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정착되기까지 많은 역사와 그 용어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터넷이나 두 분 선생으로부터의 자료를 읽으며 뼈저리게 느꼈다.

日頃何気なく使っている用語が定着するためには、大変な歴史やその用語に対する思い入れのある人々の多いこともインターネットや両先生からの資料を読んで痛感した次第である。


「토목」의 용어 유래

「土木」の用語由来

・ 1869년(메이지 2년), 민부관 토목사(民部官土木司)가 설치되면서, 직제에 처음으로 「토목」이 등장하고, 메이지 10년 내무성 토목국(内務省土木局)이 설치되어 오래 지속되었다.

・ 1869年(明治2年)、民部官土木司が設置され、職制にはじめて「土木」が登場し、明治10年内務省土木局が設置され長く続いた。

・ 한편, 메이지 원년, 회계관(会計官)이 설립되었는데, 그 직전인 4월 15일의 기사에 「개간 토목, 공사」라는 용어가 기재되어 있으며, 설립 후인 8월 22일의 기사에, 덴류강(天竜川) 제방 수축 공사를 하마마쓰 번(浜松藩)에 위임함에 있어서, ‘토목의 사무タル(たる) 본관의 전임에 속한다’라는 토목의 용어가 있다.

・ 一方、明治元年、会計官が設立されるが、その直前の4月15日の記事に「開墾土木、工事」の用語が記載され、設立後の8月22日の記事に、天竜川堤防修築工事を浜松藩に委任するに当たって、「土木ノ事務タル本官ノ専任に属ス」と土木の用語がある。

・ 메이지 2년 8월 11일, 대장성(大蔵省; 한국의 재정경제부에 해당)으로부터 영선사(営繕司)의 사무가 민부성 토목사(民部省土木司)로 전속. 토목사무·공공건축사무의 전부를 담당한다.

・ 明治2年8月11日、大蔵省から営繕司の事務が民部省土木司に転属。土木事務・公共建築事務のすべてを担当する。

・ 메이지 4년 7월 14일의 폐번치현(1871년, 明治 정부가 전국의 봉토를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정적 개혁. 이로부터 중앙집권제 확립.)으로 민부성(民部省) 폐지에 대해, 토목사(土木司)는 공부성 토목요(工部省 土木寮)가 관할하지만, 토묙요는 대장성·내무성으로 옮기고, 메이지 7년 내무성 토목요의 영선사무가 공부성으로 옮겨진다. 내무성 토목요 관할의 건축국이 문부성 제작요의 소관이 된다. 메이지 10년, 요는 국이 되고, 내무성 토목요는 토목국이 되었으며, 1931년(쇼와 6년)까지 55년간 계속되었다.

・ 明治4年7月14日の廃藩置県で民部省廃止につき、土木司は工部省土木寮が所轄するも、土木寮は大蔵省・内務省に移り、明治7年内務省土木寮の営繕事務が工部省に移される。内務省土木寮所轄の建築局が工部省製作料の所管になる。明治10年、寮は局となり、内務省土木寮は土木局となり、1931年(昭和6年)まで55年間続く。

・메이지 6년 간행된 『영화자휘』에 “Civil Engineering”이 등장하고, 「토목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明治6年刊行の「英和字彙」に”Civil Engineering”が登場し、「土木方」と記されている。

・메이지 원년 간행된 『군사소전』에 「토공병」이라는 용어는, Military Engineer를 번역한 것.

・ 明治元年刊行の「軍事小典」に「土公兵」なる用語は、Military Engineerを訳したもの。

(이상 마쓰우라 씨 조사 자료에서)

(以上、松浦氏調査資料より)


「토목」 용어의 유래

「土木」用語の由来

・ 토목 관계자는, 2002년 5월 토목학회 식전에, 탄보 노리히토(丹保憲仁) 전 회장의 기념 강연에서 『토목의 어원은 기원전 2세기경의 중국 고전 『회남자』에서 (성인내작 위지축토구목 이위실옥상동하자 …)』 이 축토구목(築土構木)에서라는 설. 그러나 타이쇼 5년(1916) 즈음의 토목학회지에서 토목의 개명론에 관한 격론이 있는 것도, 축토구목의 출전은 전문(다른 사람을 통하여 전하여 들음)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토목」의 두 글자의 역사는, 『회남자』보다 3세기 이상 앞서, 중국의 『국어(國語)』(중국 춘추시대 8국의 역사를 나라별로 서술한 책) 등에 2번이나 등장하며, 일본에서도 가마쿠라 시대의 『겐페이 성쇠기』에 도다이지(절) 건립을 서술한 바 「토목의 조록」이 있다.

・土木関係者は、2002年5月の土木学会の式典で、丹保憲仁前会長の記念講演で『土木の語源は、紀元前2世紀頃の中国古典「淮南子」に(聖人乃作 為之築土構木 以為室屋上棟下宇 ・・・)』この築土構木からとの説。しかし大正5年頃の土木学会誌で土木ノ改名論に関する激論あるも、築土構木の出典は伝聞としている。しかし、「土木」の二字の歴史は、「淮南子」より3世紀以上前に、中国の「国語」等に2回も登場し、日本でも鎌倉時代の「源平盛衰記」に東大寺建立を叙述したところで「土木(ともく)ノ造録」がある。


「건축」의 용어 유래

「建築」の用語由来

・ 호리타 츠노스케(1823~1894) 등 편 『영일대역수진사전』(분큐 2년[1862], 양서조소, 출판지: 에도)
– Architect 건축술(術)의 학자
– Architecture 건축학

・ 堀達之助(1823~1894)等編「英和對譯袖珍辞書」(文久2年(1862年)、洋書取調所、出版地:江戸
– Architect 建築術ノ学者
– Architecture 建築学

・ 메이지 4년 11월 『슈진에이와세츠요슈 全』에 같은 번역

・ 明治4年11月「袖珍英和節用集 全」に同じ訳

・ 메이지 2년(1869) 『사츠마 사전』, 상하이에서 인쇄 간행

・ 明治2年(1869)薩摩辞書、上海にて印刷刊行

・메이지 6년(1873) 『도쿄 신제활판 소장판 일역영사전』
– Architect 건축학자
– Architecture 건축술

・ 明治6年(1873)「東京新製活版所蔵版和譯英辞書」
– Architect 建築学者
– Architecture 建築術

・ 메이지 6년(1873) 「공학요・학과병제규칙」

・ 明治6年(1873)「工学寮・学課並諸規則」

・ 전문과를 나누어 토목·기계·조가·전신·화학·야금·광산의 7개과로 6년 만에 졸업할 수 있다.

・ 専門科ヲ分チテ土木・機械・造家・電信・化学・冶金・鉱山ノ七科トシ六ヶ年ヲ以テ卒業ノ期トス。

・ 메이지 18년(1885) 코부대학교 학과병제규칙
– 학과 : Build, Construct 등으로 건축 / Architecture 조가

・ 明治18年(1885)工部大学校 学課並諸規則
– 学課 : Build、Construct等に建築 / Architecture 造家

・ 메이지 19년(1886) 조가학회 발족, 발행잡지명 《건축잡지(建築雑誌)》
– 정(회)원은 건축학을 전공한 자

・ 明治19年(1886)造家学会発足、発行雑誌名「建築雑誌」
– 正員は建築学を専修したる者

・ 메이지 27년(1894) 이토 추타「우리 조가학회의 개명을 원한다」(메이지 30년 3월 발행의 건축잡지)

・ 明治27年(1894)伊東忠太「我造家学会の改名を望む」(明治30年3月発行の建築雑誌)

・ 메이지 30년(1897) 조가학회를 건축학회로 개명

・ 明治30年(1897)造家学会を建築学会に改名

・ 메이지 31년(1898) 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가학과를 건축학과로 개명

・ 明治31年(1898)帝国大学工科大学造家学科を建築学科と改名

(이상, 다카하시 씨 조사자료에서)

(以上、高橋氏調査資料より)


오지마(필자)의 사족입니다만,

尾島の蛇足ですが、

20세기 후반에 빛난 단게 겐조(丹下健三)나 키쿠타케 키요노리(菊竹淸訓)로 대표되는 일본의 건축가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장대교(長大橋)나 해저터널을 건설한 토목기술자들의 명성과 성과를 바탕으로, 건축과 토목을 합한 건설 산업이 인기였다. 그러나 그 시대야말로,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간이었던 것 같고, 결과적으로, 일본은 세계의 DX(Digital Transformation)에 뒤졌다.

20世紀後半に輝いた丹下健三や菊竹清訓に代表される日本の建築家や、世界に誇る長大橋や海底トンネルを建設した土木技術者の名声や成果を礎に、建築と土木を合わせた建設産業が花形であった。しかしその時代こそ、日本の失われた30年間であったようで、結果として、日本は世界のDX(Digital Transformation)に乗り遅れた。

생각한 바와 같이, 이공학부의 건축학과나 토목공학과는, 건축학부나 사회공학과로 발전·해소하는 쪽으로 명칭을 바꾸기 시작했다. 건설업계도 “Construction”에서 “Production”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기술로 전환, “Architecture”와 “Civil”의 용어도 BIM 및 CIM 시대에 있어서, 그 뜻하는 바가, 최근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보아, 건축이나 토목 전문가가 아니라 정보 분야에 속한 사람들 같다.

果たして、理工学部の建築学科や土木工学科は、建築学部や社会工学科へと発展・解消する方向に名称を変え始めた。建設業界も”Construction”から”Production”へと、アナログからデジタル技術へ転換、”Architecture”や”Civil”の用語も、BIMやCIM時代にあって、その意味するところが、最近よく使っている人々の声から、建築や土木の専門家ではなく、情報分野に属している人々のようである。

건설산업계에 두드러진 고령화와 인력부족, 생산효율의 저하는, 건축이나 토목의 기술이나 문화에 집착한 우리 세대가 세계의 조류에 뒤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재난의 스테이홈에서는 반성뿐이다.

建設産業界に際立つ高齢化や人手不足、生産効率の低下は、建築や土木の技術や文化に執着した私の世代が世界の潮流に乗り遅れているためであろう。コロナ禍のステーホームでは反省ばかりである。


※ 이 글은 도쿄오지마토시오연구실 블로그에 2021년 2월 26일자로 게시된 글의 원문과 그에 대한 한글 번역문입니다. 서구의 용어인 ‘architecture’를 ‘建築(けんちく; 건축)’으로 아시아권에서 처음 번역한 일본의 초기 상황과 관련한 정보를 참고하기 위해 검색한 결과물들 중 하나였습니다. 원문과 저의 거친 번역문을 올림에 있어, 필자인 오지마 토시오 님의 양해와 허락을 구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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